레이디버드 일상다반사

 사랑이 혈연관계에 종속되는 감정이라면, 호감은 관계를 벗어나 개인의 취향에 의존하는 감정이다. 크리스틴은 매리언이 자신을 딸이 아닌 개별적인 인간으로서 좋아해주길 바란다. ‘레이디 버드’라는 예명도 이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크리스틴은 방 벽면 가득한 낙서들을 하얗게 덮으며 어른의 시기를 맞는다. 그러나 새크라멘토의 구석구석을 더듬던 카메라는 까마귀 클럽의 네온사인을 잠시 비출 뿐이다. 생각보다 어른의 시간은 간단하고 시시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동경하던 뉴욕에 마침내 도착한 크리스틴은 그곳에서 새크라멘토를 본다. 악수하는 버릇을 언급하는 남자는 전 남자친구 카일을, 브루스 별은 첫사랑 대니를, 응급실의 간호사는 엄마 매리언을, 성당의 성가대는 그들이 함께했던 서투른 뮤지컬을 떠올리게 한다. 눈에 붕대를 감은 어린 소년의 얼굴은 오빠 미구엘을 닮았다. 미구엘도 소년과 같이 상처를 안고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크리스틴이 벗어나고 싶었던 일상이 그녀의 일부가 되었음을 본다. 그녀는 가족에게 전화하여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예쁘다고 말한다. 엄마 매리언도 서투른 고백을 한다. “레이디 버드라는 너의 이름이 참 예뻐.” 그 고백은 자신을 좋아하냐고 묻던 딸의 질문에 대한 엄마의 뒤늦은 응답이다.

 너무 가까워서 서로를 보지 못했던 것일까. 그들은 공간(뉴욕과 새크라멘토 사이)과 시간(유년기와 성년 사이)의 거리를 맞이하고서 서로를 온전히 바라보고 인정한다. 그러나 거리두기는 이별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공항에서 크리스틴을 배웅할 때 매리언이 입은 붉은 치마는 크리스틴이 프롬(미국 고등학교의 무도회)에서 입었던 붉은색 드레스와도 닮았다. 이 영화를 두 여자의 프롬으로 봐도 좋을까.

 모녀란 결국 긴 시간을 건너서 서로의 닮음을 확인하고 위로하는 두 여자를 이르는 말이 아닐까. 영화가 끝나기 직전, 크리스틴은 매리언에게 하나의 질문을 건넨다. “엄마도 새크라멘토를 처음 운전할 때 감상에 젖어들었어?” 그녀는 지금 지독히도 떠나고 싶었던 풍경을 바라보며 지독히도 멀어지고 싶었던 이를 다시 생각하고 있다. 나와 닮은 당신은 흘러간 어느 순간에 나와 닮은 감정을 느꼈느냐고.

영화 레이디버드만큼이나 좋았던 이 글(https://brunch.co.kr/@comeandplay/109).
이 글을 읽고나서 이 영화가 더 좋아졌다.

나의 4월 일상다반사

 1. 인턴에 지원했고 떨어졌다. 어쩐지 아주 오래된 일인 것처럼 시간적 거리감이 느껴진다. 합격하리라 기대했던 건 아니었지만 떨어질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에 지원했다. 그래서 나는 불합격 소식을 듣고 3시간 정도 우울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불안감보다 호기심이 진해졌다. 나는 과연 '일'을 할 수 있을까? '일'을 하는 나는 어떨까? 그리고 그 '일'은 지속적이고 가치 있는 일일까. 그러나 나는 계속 먼 미래보단 한치앞만을 보고 있다. 내일의 나에게, 미래의 나에게 할 일을 미루는 못된 습관이다. 내일의 나도, 미래의 나도 결국 '나'인데.

 2. 중간고사를 준비해야했다. 나의 마지막 중간고사였지만, 한 과목밖에 없었지만 여느때처럼 하기 싫었다. 여전히 정이 가지 않는 내용이었고 의미없는 내용이었다. 시험은 잘봤지만 머리 속에도, 마음 속에도 남아있는 건 없었다. 이번 학기는 텅 빈 시간이 되었다. 안개처럼 뿌옇지만 덧없다. 하기 싫은 걸 하기 위해서는 먹어야 했다. 의미없는 섭취에 불과했고 일시적인 쾌락에 지나지 않았지만 덕분에 시험 공부는 했다.  

 3. 알바를 하면 더 많이 놀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번 돈은 티끌에 불과했고 티끌은 모여도 티끌 밖에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나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먼저 연락해서 만나도 나는 그 사람에게 티끌같은 존재라는 걸 확인받는 시간같았다. 내가 자초한 일이지만 서운함의 연속이고 결론은 끝없는 외로움이다. 나는 혼자였지만 다시 또 혼자고 앞으로도 홀로 남을 것이다.
 싱가폴에서 돌아온 친구를 만났다. 고등학생이었던 우리는 성인이 되고 많이 달라졌다. 각자가, 둘의 관계가, 둘을 둘러싼 환경이. 그 시간은 우리가 얼마나 달라졌고 앞으로 더 얼마나 달라질지 암시하는 시간이었다.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많아질 때 관계의 끈은 느슨해진다는 걸 느꼈다. 탄탄하게 조이고 싶지만 그럴 방법을 찾지 못해 풀리는 끈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이 친구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과도 마찬가지다. 나의 관계들은 풀리고 있다.

 4. 엄마가 돌아왔다. 다시 서울로 발령이 났을 때, 나는 진심어린 축하를 해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저 기쁘지만은 않았으니까. 엄마도 그런 나를 눈치챘는지 몇번이고 엄마가 돌아와서 좋지 않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나는 위선과 죄책감에 시달렸다. 엄마가 서울로 발령이 난 건 축하할 일이지만 같이 살아야한다는 건 전혀 기쁜 일이 아니었다. 그건 엄마라서라기보다, 엄마여서 이기도 하지만, 나는 나의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집에서도 나는 내 방에서조차 편안하게 쉬지 못한다. 어떻게든 내 공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집에 한 명이 더 살게 되는 것이다. 내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집에 돌아왔을 때, 너무 답답하고 짜증나서, 그런 내가 너무 미워서 괴로움의 눈물을 쏟았다.
 엄마가 돌아와서 좋지만 좋지 않다. 그래서 엄마와 나 사이에는 또 다른 벽이 생겼다.

 5. 나는 다시 폭식을 시작했다.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을 지우려 했다. 다시 위염은 시작되었고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안되어 답답하다. 속이 답답하다. 답답하다. 나는 내 자신이 답답했지만 다시 또 답답해하고 앞으로도 답답해할 것이다.

 6. 워크캠프에 지원했다. 같이 갈 친구를 구했지만 그 누구도 응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결과지만 마음이 욱신욱신했다. 나는 사라지고 싶었기 때문에 어디든지 상관 없었다. 혼자라서 어디든지 상관 없었다. 그러나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한치앞은 정했지만 먼 미래는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여유를 즐기고만 싶다. 물질적 여유와 정신적 여유.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는 그럴 수 없지만.

7. 한국사 시험을 보려한다. 이것 역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공기업 지원할 때 조금이나마 유리해지기 위해서 일단 시험 접수는 했는데 내가 공기업을 갈지는 모르겠다. 정말이지 나는 무얼 해야할지 모르겠다. 대학원도 취업도 모두 뜬구름같다. 나는 여전히 15살에 멈추어 있는걸까. 

이번달에 한게 없다보니 짤막짤막하고 이음새없는 글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달도 그러리라는 예감이 온다. 한 건 없고 단편적인 삶.

로움 일상다반사

외로움
슬기로움
해로움
새로움
괴로움
지혜로움
수고로움
향기로움
번거로움
자유로움
이로움


일상다반사

하고 싶은게 생겼고 하고 싶은게 없어졌다.
뭐든 될 수 있을것만 같았고 뭐든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 정도면 괜찮은 줄 알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알았다.
사라지고 싶지만 여기 이곳에 붙들려 있고 싶다.
적극적으로 존재하고 싶지만 소극적으로 마냥 서있다.

그게 나다.


나의 3월 일상다반사

1. The meaning of the river flowing is not that all things are changing so that we cannot encounter them twice but that something stays the same only by changing.
 강이 흐른다는 의미는 모든 것이 바뀌므로 두 번 만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변화함으로써 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헤라이크레이토스의 '우주의 파편'>

4년만에 홍콩을 다시 찾았다. 전공연수를 마치면서 언젠가 다시 돌아오리라 생각했던 곳이었는데 그게 진짜 일어날 줄 몰랐다. 그리고 4년만에 다시 엄마와 여행을 하게 되었다. 아무도 나를 반겨주진 않았지만 나는 홍콩이 반가웠고 침사추이가 반가웠고 스타페리가 반가웠다. 힘들었던 여행이었지만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여러개 있다. 그 중 하나가 퍼시픽 커피에서의 짧은 회고다. 스무살의 나는 지금의 나와 너무나도 다른 것만 같았다. 항상 나대로 살아왔다 생각했는데 나는 변해있었고 그럼에도 결국 나였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매 순간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하면서 바뀌고 있지만 자기동일성은 잃지 않고 있다. 신기하고도 서글픈 일이다. 4년후의 나는 어떨까.

2.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항상, 지금도 그렇지만, 마음 불편하게 여유로운 것보다 마음 편하게 쪼들리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부모님도 같은 신조라 2년 넘게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학기에 수업을 하나만 듣게 되면서 빈 시간을 어떻게든 채우고 싶었고 그 때 떠오른 건 아르바이트였다.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 돈이나 벌자는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일을 하니까 역시나 일은 하기 싫고 돈만 쓰고 싶다. 불과 몇년전만 해도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면서 무소유의 정신으로 꽉 차 있었는데 이젠 돈은 무조건 있어야만 하고 소비의 테라피적 기능은 대단하다는 걸 느꼈다. 여전히 나는 사회생활에 서툴고 미숙하다. 이 나이 먹고 이렇게 어리숙한게 티나다니.

3.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이 있었다. 한 명은 고등학교때 친구의 친구였던 소중. 몇년만에 연락이 와서 만나게 되었는데 편입을 준비했고 올해 드디어 입시생활이 끝나서 생각이 났다는 것이다. 예상치도 못했던 사람과 예상치도 못했던 소식이었다. 그래서 만났는데, 솔직히 어색할 줄 알았지만 나는 너무 외로웠다, 이야기는 물 흐르듯 잔잔하게 흘렀다. 그렇게 나는 친구를 한 명 더 얻었다.
 다른 한 명은 교환학생을 같이 갔던 민디. 역시나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 어색할 줄 알았는데, 심심한 듯 심심하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캄보디아에서 인턴을 마치고 돌아왔고 이번엔 코이카에서 두번째 인턴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지금까지 6번이나 인턴에 떨어진 나는 어쩐지 열등감이나 부러움보다는 대단하다고 멋있다는 생각뿐이었다. 멋있다. 그게 다였다. 나는 여전히 일할 마음이 없나보다. 교환학생 추억팔이하며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함에 한탄하던 우리였다.

4. 살이 빠졌다. 운동 선생님이 많이 빠졌다며 칭찬하셨는데 신기하기도 하고 사실 많이 빠진건 아니지만. 건강해지고 싶어서 거의 매일 운동하고 있다. 식단 조절도 하려고 노력하지만 여전히 폭식은 나아지질 않고 덕분에 위염도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한다. 건강하지 않은 걸 먹기 위해 건강한걸 먹는 수준. 무엇을 먹느냐만큼 중요한게 얼마나 먹느냐라고 의사선생님이 그러셨는데. 계속 주의하고 시도해봐야한다. 폭식도 위염도 오래되어서 쉽게 고쳐지질 않는다.
 엉덩이를 만들고 있다. 휜 척추와 다리로 몸은 균형이 없고 코어 근육도 전무하다. 그래서 복근 운동은 도저히 못하겠고 엉덩이라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엉덩이 운동을 매일 하고있다. 많이는 아니지만 매일매일 조금씩 하니까 확실히 엉덩이가 생기는게 보인다. 이거라도 있는게 어디야!

5. 도서관에서 책을 빌린다. 한 학기에 수업 하나만 듣는 만큼, 마지막 학기인만큼 학교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낌없이 해야겠다 싶었다. 새해 목표로 한달에 한권씩 읽기로 다짐했는데 1,2월 성적은 초라했지만 3월만큼은 다독왕이 되었다. 딸에게 주는 레시피, 사우스포인트의 연인,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무려 한달에 다 읽었고, 1년에 책 한권도 안읽던 사람이, 지금은 무엇이 삶을 예술로 만드는가와 2018 올해의 문제 소설을 읽고 있다. 예전에는 내가 배우고 공부할 수 있는 책만 찾았는데 이제는 소설을 많이 읽고 있다. 나는 더 다양한 이야기를 접하고 삶을 만나고 감정을 느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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