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 일상다반사

  '기대'에 관한 글을 쓰려고 이글루에 들어왔는데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모르겠다. 오래 전부터 나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기대를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은 나는 내가 주는 만큼 상응하는 보답을 바라지 않고 그저 나의 만족을 위해서 내가 하고 싶은 만큼만 하기로 결심했다. 예를 들면, 선물을 줄 때 나도 당연히 나중에 비슷한 값어치의 선물 또는 축하를 받으리라는 바람을 흘려보내고 내가 주고 싶어서, 선물을 받는 그 사람의 반응을 내가 보고 싶어서 즉, 내 마음 편하자고 관계에 힘을 쏟는 것이었다. 이기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사실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나는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지 못했다. 나는 이만큼을 했는데 너는 나에게 이만큼밖에 못하냐는 관계의 불균형에 화가 났다. 가족이라면, 친구라면 혹은 그 이외의 '관계'라고 하면 보여지는 일정한 양상의 오고 감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저버리지 못한 것이다. 관계의 형평성에도 화가 났다. 나는 이만큼을 했고 그는 나의 반의 반도 안했는데, 혹은 내 눈엔 반의 반도 안한 것 같이 보이는데, 나와 똑같은 대우를, 나보다 더 좋은 호의를 받는 것이다. 언젠가 인간은 정의를 향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글을 본 것 같은데, 그 순간 나도 내 안에 숨어있던 정의감을 불태운 걸까? 억울함 때문이었을까? 나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이런  일들이 되풀이 되는게 서운했고 지겨웠고 그리고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게 답답했다. 두서없는 이 글만큼이나 나를,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어렵고 애정에 목말라하는 내 자신이 불쌍했다. 가족 안에서 보여지는, 사회 속에서 보여지는 바람직한, 이상적인 관계의 모습들이 나로 하여금 애정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든다. 기대라는게 얼마나 잔인한지. 다른 사람의 행복을 행복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게 얼마나 잔인한지. 그러나 누구의 탓을 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외로움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허우적, 허우적. 숨을 쉬려고 고개를 치켜든다. 그리고 생각이 든 것은 새로운 상대를 찾아본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사람이라든지, 그가 남자든 여자든, 반려동물이라든지, 혹은 나 자신. 그러나 모두 쉽게 엄두가 나지 않는다. 노력은 해보고 있는데, 아니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 TED 영상에서 본 그 분처럼 언젠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과거의 나를 돌아볼 수 있을까. 쉽게 불안하고 눈물이 나고 괜찮아진 것 같, 괜찮은 척하다가 의미가 사라져버린다. 관계의 의미, 삶의 의미, 나의 의미. 붙잡아야 하는데! 

넌 왜 연애 안해? 일상다반사


'넌 왜 연애 안해?'라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이렇게 답한다.

'별로 관심이 없어.'

 내 대답은 주로 2가지로 해석된다. 연애라는 경험 자체에 관심이 없거나 남자에 관심이 없거나.

 전자로 해석한 사람들은 젊었을 때 연애를 하지 않는 것이 청춘을 낭비한다는 점에서, 아니면 연애를 하지 않는 것 그 자체로 아깝다고 말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삶을 충만하게 한다면서. 나도 연애가 풍부한 감정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관심이 없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연애라는 경험보다 사람을 사귀는 일이다. 나의 관심의 방향은 '나'로 향한다. 이기적인 사람이기보다 내향적(內向的)인 사람이다. 나의 기분, 반응, 경험을 살피고 나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관심의 잔여는 현저하게 줄어든다. 그마저도 가족이나 친구에게 쏟고 나면 낯선 사람에게 보낼 관심이 없어진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일이 드물게 일어났고 사람을 사귀는 방법이 낯설어졌다. 누군가와 친해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단편적인 삶을 살면서 내 안의 관심의 총량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후자로 해석한 사람들은 여자를 좋아하냐는 유치한 사고방식을 보여주거나 눈이 너무 높은 거 아니냐는,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평가'를 내린다. 니가 너무 차갑게 굴어서, 애교가 없어서, 무뚝뚝해서라며 나를 '여자'라는 프레임에 가둔다. 설령 내가 눈이 높다고 해도 내게 문제가 있다고 추론할 수 없다. '나'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할말하않) 연애를 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부추기는 사회의 눈, 연애를 하지 않는 것이 특히 '여자'의 문제라는 사회의 눈. 연애는 어디까지나 선택의 문제다. 스스로 선택을 내리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가 가지고 가는 것이다. 나의 선택이고 나의 책임이다.



근황 일상다반사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 카레를 먹을까 마라샹궈를 먹을까 연어덮밥를 먹을까, 점심으로 먹어버리자 해서 연어덮밥을 먹으러 갔다. 혼자서 밥을 먹는다는 위축감 때문인지 밥보다는 다른 곳으로 눈이 갔고 그래서 위축감을 느끼는 사람을 한 명 더 볼 수 있었다. 잔소리인지 조언인지 애매한 사장님의 말을 묵묵히 받아내는 알바생. 2년 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식사에 집중하기 어려웠고 내 한 끼를 망쳐버린 것 같아 찝찝한 후회가 남았다. '다른 데 갈 걸, 다른 걸 먹을 걸.'

 나는 후회가 많은 사람이다. 점심 메뉴 하나로도 아쉬움을 느끼고 수업 시간에 질문할 기회를 놓친 것 때문에 시간을 돌리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후회가 많으면 더 이상의 후회를 만들고 싶지 않아 결정을 미루게 된다. 과제를 내일의 '나'에게 미루고 머리를 자르는 걸 다음 달의 '나'에게 미루고. 그렇게 평생을 미루고 살다보니 나는 뭐 하나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는 겁쟁이가 되었다. 내일의 '나'는 곧 오늘의 '나'고 과거의 '나'다. 형이상학적 자기동일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형이상학 들은 티 내기)

사실 이 글을 쓰는 것도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에게 미룬 것이기 때문에 원하는 방향대로 전개되지 않고 있다. '원하는 대로', '전개되지 않고 있다.' 원하는 바는 진심을 가득 담은, 완벽한 기승전결의 구조흘 가진 글을 쓰는 것이었다. 완벽에 대한 강박,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행복에 대한 강박과 글을 쓰는 것에 대한 강박,은 나를 건설적이고 적극적인 완벽주의자가 아닌 게으르고 소극적인 완벽주의자허 만들었다. '행복하게 해주세요.' 아니면 '행복을 찾은 방법을 찾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은 빌지만 특별한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 미래의 '나'에게 미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글은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에게 남겨둔 과제다. 두 번째 강박은 '전개'다. 시간과 효율에 대한 집착이다. 20살에는 대학생활을 즐기고 23살에는 취업을 준비하고 25살에는 취업을 해야 한다는 전개. 빈틈없이 채워지는 테트리스처럼 그렇게 콤보를 달성하고 싶었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전개되지 않고 있다.'
 
 오늘의 '나'는 과거의 '나'에게 책임을 미룬다. 니가 지금까지 결정을 미뤄서 일이 이렇게 된 거 아니야! 그래봤자 내 머리 속이다. 나는 지금 졸업을 앞두고 방향없는 진로를 다음 여정으로 계획해두고 있다. 무계획을 계획으로 두다니 모순 덩어리다. 누군가 목적지를 정해줬으면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에게 선택권을 미루는 거니까 문제가 더 커진다. 나의 선택이고 나의 책임이다.

-쓰고 싶은 글은 많은데 잘 쓰고 싶은 마음에, 복잡한 마음에 의해 외면당한다.
-그래도 쓰긴 썼는데 구리다... 구려. 쓴 거에 의의를 둔다.


일본 여행 일상다반사


길고도 짧은 밤이 마무리된다, 재즈 음악과 담배 냄새와 오코노미야끼와.
나는 변하지 않았고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유감이지만 다행이었고 지겨우면서 새로운 나다. 제자리인 것 같지만 다른 곳에 와 있고 방향을 잃어버렸지만 금새 노선을 수정했다. 반복 속에서의 불규칙, 그러나 불규칙의 반복이고 불규칙은 곧 반복에 속한다, 반복이라는 큰 틀 안에.

의미를 더하자면 한도 끝도 없이 덧붙일 수 있다. 미리 졸업여행이자 공강을 알차게 보내려고 한 노력이고자 일본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하며 혼자 여행이란느 허세를 부리고 지속되는 불안을 떨쳐보려는 시도이자...라는 게 구질구질했다. 구질구질한 줄 알았다. 구질구질의 아름다움은 모르는 나는 바보다.

얼굴 빨개지는 아이

  

 나는 본래 사람을 사귀는 데 재능이 없는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낯선 사람을 만나면 엄마 뒤에 숨기 바빴고 학교를 다닐 땐 누군가가 먼저 말 걸어주길 기다렸고 그리고 지금도,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지만, 어색한 대화의 흐름보다 썰렁한 공기의 흐름을 읽는 게 더 쉬운 사람이다. 그런 내가 친구를 사귀는 방법으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나와 친해지고 싶다며 먼저 호감을 표하는 사람을 사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친구의 친구를 사귀는 것이다. 북극성은 후자로 친해진 친구이다. 친구의 친구였고 지금은 내 친구가 된 북극성은 나와 굉장히 비슷하면서도 한끝차이로 서로를 구별 짓는다. 위선보다 진실로, 이기보다 배려로 가득 찬 사람이다. 나는 겉과 속이 다른 진실과 배려로 포장된 이기심으로 채워진 사람이다.

  비슷해 보이는, 그리고 어느 정도는 진짜로 비슷했던 둘은 친구가 되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나는 소심했던 반면에 북극성은 활기찬 아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마음의 크기를 넓혀갔고 북극성은 마음의 문을 좁혔다. 그리고 지금은 청소를 깨끗이 했는지, 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켰는지 몰라도 두 사람 모두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균형 잡힌 관계를 유지해오면서 나는 스물세 번째 생일을 맞았고 북극성은 얼굴 빨개지는 아이라는 책을 내게 선물했다. 내가 얼굴이 빨개지는 마르슬랭일 수도, 전혀 감기 기운이 없는데 재채기를 하는 라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고 각자의 고민은 각자의 특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몇 가지 질문을, 아니 그보다는 항상 똑같은 내용의 질문 하나를 던지곤 했다.

-그들은 정말로 좋은 친구였다. 그들은 짓궂은 장난을 하며 놀기도 했지만, 또 전혀 놀지 않고도, 전혀 말하지 않고도 같이 있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함께 있으면서 전혀 지루한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부모들이란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부모들은 항상 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고 항상 시간에 쫓긴다…….

-사실, 삶이란 대게는 그런 식으로 지나가는 법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우연히 한 친구를 만나고, 매우 기뻐하며, 몇 가지 계획들도 세운다. 그러고는, 다신 만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간이 없기 때문이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며,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살기 때문이다. 혹은 수많은 이유들로. 그러나 마르슬랭과 르네는 다시 만났다.

 

원래는 책을 읽고 나서 독후감을 써서 보여줄 생각이었지만 일단 첫 번째로 글을 너무 못썼고 두 번째로 연애편지마냥 오그라든다. 그래서 아마 보여줄 일은 없겠지만 부족한 글로나마 친구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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